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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길, 도교, 유교, 불교와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의 길, 그리스도가 인간의식, 인류와 지상세계의 변화에 기여한 공헌

다방면의 경험과 학술연구에서 얻은 새로운 관점등을 소개하는 독립정보 사이트. 개인의 발전을 위해 유용한 참조사항사항등 수록

한국어 간략판.

종교란 인간과 신과의 역결합-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길

예수 그리스도와 도교, 유교

예수 그리스도와 불교에 관한 정보

복음과 계시록등의 광대한 텍스트 전문을 이미 영어웹사이트등 여러가지 언어로 제공하고 있으며 1), 현실감에 맞게 항시 개정하고 있다. 본문은 홈페이지임.

 

"인간에게 영감을 주어,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당신의 손에 맡기게 하소서.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도우소서
이세상을 도약시켜, 당신이 약속하신 새시대로 이끄소서".

검색기계등을 위함  http://www.ways-of-christ.com/ko

 

[1] 몇가지 언어로 소개된, 광대한 텍스트 전문의 수록내용: 본문 1부 : 본문의 의미와 사용법 입문, 명상에 대한 지시사항등.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니...". 나자렛의 예수. 예수의 출생. 그리스도적인 의미에서의 다시 태어남. 예수의 소년시절에서 의미심장한 것들을 찾을수 있나? "두명의 예수 - 소년". 세례요한을 통한 요단강에서의 세례에 관한 논쟁. 부록페이지. 오늘날 세례에 대한 주석. 사막의 적막함. 시험. 가나의 혼인잔치. (성과 감정 (sympathy)과 느낌 (empathy), 그리고 사랑등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관점) "거룩한 열성"과 (인간정서에 관한 관점). 산상수훈 (오성 즉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관점). 변화산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변모. 기적에 관한 질문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 "양들". 그리스도와 발 씻겨주심. 베다니언에서 기름부음 (그리스도적 영성에 대한 중대한 관점들). 만찬. 잡히시어 채찍질당하심. 가시면류관을 씌우심과 고별설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매장당하심. 기독교적인 신비에 대한 참조사항. 빈 무덤에 대한 질문. "지옥행"과 "낙원행". 부활. 천국행. 승천. 성령강림사건. 예수상.
본문 2 부:요한 게시록. 예언을 받아드리는 법. 요한게시록 내용: 일곱 교회. – 오늘날의 교회나 신학의 흐름, 또 세계 교회 (ecumene) 에 관하여, 일곱 인, 일곱명의 나팔수,"일곱번 천둥침" 과 예언자 두명. 여인과 용. 바다서 난 머리가 일곱인 짐승. "최후의 일곱까지 재앙과 바빌론의 멸망, 그리고 예수 재림;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마지막 장: 기독교적인 것; 율법판. 기독교적인 자세 – 즉 "세상에 살아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세, "제 3의 길". 서술능력에 대한 참조사항. 인쇄판과 권리. 전자우편 양식 (E-Mail). 3. 다른 테마들: 평화와, 삶, 지구를 위한 기도; 도덕가치의 기반; 현대의 "예수-폭로-모든것" 에 관한 짧은 정정; 예수와 영양문제; 자연과학과 신앙; 예수와 병 치유 – 오늘날에도 역시; 축복; 경제와 사회문제에 관한 기독교 관점; 사회와 정치에 관한 관점; 철학과 기독교 – 독일학자 하버마스의 연설 "신앙과 지식" 에 관한 논평. 생태학과 창조, 태어나지 않은 생명; 이러한 면과 방향에 관한 기독교 신학; 기독교 명상; 영감과 교회; 죽음 후의 삶과 이 삶의 의미; 기독교와 "운명" 과 "윤회" 교리에 관한 기독교의 관점; … 4. 구약과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를 위한 기여: 구약, 유태인 종교 그리고 예수; 예수, 이슬람교, 불교; 자라투스트라교 (파르시즘), 힌두, 도교, 유교, 신도교, 자연신앙; 하느님과 인간을 "재결합" 시키는 종교. 교회사에서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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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그리스도의 길

예수 그리스도와 도교, 유교에 관한 정보

이 부록 페이지에는 도교, 유교 및 다시금 그 영적 깊이가 의식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연구한다. 여기에서는 노자와 공자의 삶과 전통을 포괄적으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만을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전통적인 중국영성에는 여러가지 유사한 근원이 합류된다:

궁극적 원리에 대한 본래의 ()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궁극적 원리인 도[1] 에 대한 본래의 학설에서도 모든 만물의 최초, 즉 음과 양[1] 양극과 그리고 그후의 "다섯가지 기본요소"로 분열되기 이전의 원초적 통일체에 대해 서술한다. 이 원초통일체는 오늘날의 우주 형상 배후에 숨어있다.

[1] 음이란, 예를 들면 교감신경내에 위치한, 확장성 성질을 지닌 "여성적"원리이며, 양이란 초교감신경내에 위치한, 융합성 성질을 띤 "남성적" 원리이다. 이 둘은 서로 상호작용한다. "기본 요소 다섯가지 즉 흙, , 나무, , 금속으로의 분류는"은 고대 서양문화의 연금술 (Alchemy und Hermetic teachings)이나 또는 타 문화권에서도 많이 목격되는데, 만물형상을 네가지 형상형태 혹은 특성에 따라서 ten "", "", "공기", "" = ""로 구분한것과 상응한다. (기독교에도 연금술이 존재했다). 중국의 다섯 번째 기본 요소 "금속"은 유럽에서는"최초물질 prima materia" "또는 prime matter",이라고 칭한다. (비교. 현대 소립자이론) 또는 예를 들어 총 일곱 개의 집합상태인양 다른 그런 요소들을 포함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고대 인도나 인류학의 원전에 따라 "에테르"라 칭한다. 그런 옛 인식들은 오늘날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에 부속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당시와 오늘날의 인식방법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그러한 인식체계도 순수한 사변적철학이 아니라 옛날의 그 나름대로 발전된 자연과학의 성격을 지닌 우주론이다.

고대중국과 그후 도교 스승들의 실천행적이 영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정신적 종교적 완성에 관한 것으로서, 이승의 불완전함은 다루기가 힘들므로, 당시 학자들의 "기본요소"나 혹은 인간능력이 하는 역활에 관한 연구결과는 단지 고려만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결국 이생에서의 도피를 시도하지 않는, 몇몇 다른 영적인 전통과는 구분되는 영성의 한 종류라고 볼수 있다. 그러한 자기 완성본능 자체는 우선은 기독교에서의 인간 구원에 관한 가르침과 반대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예수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테오전서.5,48"라고 말씀하신 것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온전해지는 방법은 여러가지로 다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를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또 일으킬수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그런 행적을 함으로 억지로 얻어 낼수는 없다는 것도 또한 항상 분명했다. 하나님은 자유로와 구속을 받지 않는다.

하늘 ""과 땅과 인간세계는 모두 똑같이 동일한 원초통일체에서 생겨났고, 그러므로 그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사이에도 전부 상응하는 점이 있다. (이는 마치 유럽중세대학의 "일곱 자유학예"와도 비슷하다). 그렇게 인간노력 모두가 인간 삶과, 오늘날에도 최고의 궁극적 권력인 "하늘"과 그리고 땅과의 조화를 이루는데 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종교란 말은 만물의 근원과의 "역결합", "재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관점에서는 우리가 직접 대할수 있는 창조주가 만물의 근원이며, 우주의 처음과 끝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이러한 연결 결합을 도와주는 연결고리같은 존재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고대중국에서는 다수의 분리된 신들, 즉 하늘신, 땅의 신 (지신), 각 지방 혹은 장소에 깃든 신령이나 성인들을 섬겼다. 그러한 종교들에 통용되는 개념인 "다신주의""", 다른 여타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원초적이고 궁극적 원리가 작용한 한 결과로 생겨났거나 아니면 그 특질에 불과하므로 우리에게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 몇 교회분파에서도 알려진 듯한 성인숭배는 제외하고서다).

도교

지금까지 묘사한 점들은 (역사가들이 대개 기원전 500년경으로 분류하는) 나중에 생긴 노자학파 그리고 공자 학파에 공통적으로 근간을 이루었다.

도교 (노자: 특히 그의 책 "도덕경") "무위"의 명상적 자세에서 실행하는 인간행동을 중요시 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지성차원에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일치하는 인간의 선한 본성, 즉 자연적인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유도하려 함이다. 결국은 자기를 없애는 몰아와 겸허라는, 자연적인 윤리도덕 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선한 본성은 요한복음 15장에서처럼("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인간속에 형체를 가져 열매를 맺는 예수와 자동적으로 같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단 종교교도들의 선한 본성을 더이상 논박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종교들의 윤리강령이 비슷하고, 어느 종교에서나 ""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령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데로 간다 (요한복음.3).

도교인들은 늘 실천가이지, 이론가가 아니었다. 도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유교

공자 역시 인간에게 "우주 도덕법칙"내에서의 인간의 순응을 권한다. 도교의 개인적인 도대신, 공자는 전 사회 안에서, 그리고 전 사회를 위한 도덕적인 교육제도를 더 추구했다. 좋은 습관을 들이고, 본보기를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의식적으로 연마하고 완성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가정에서 사랑과 존경심을 배우면, 그로부터 도덕적인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1. 옛적부터 중국에서는 예를 들어 살인, 도둑질, 매춘, 우상숭배가 금지되었다.
  2. 거의 모든 다른 세계 종교에서처럼 공자도 "네 스스로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이웃사랑을 가르쳤다.
  3. 여기에는 자기극복, 인간성과 타인에 대한 선의 혹은호의, 공명정대함, 적절하고 공손한 태도(조상선조에게도 마찬가지), 관대함, 지혜, 성실정직함이 포함된다.
  4. 서경에 인용된 이중 미덕들: 친절하면서도 근엄함, 온화하면서도 확고함, 직설적이면서도 공손함, 질서를 지키면서도 존경심을 보임, 배운 것이 많아도 대담함, 성품이 곧으면서도 부드러움, 생각이 깊으면서도 중도를 지키고, 강하면서도 신뢰감 있고, 용감하고 정의로움.
  5. 분노와 불만, 뿐만 아니라 쾌락도 초월한 겸허한 자기만족의 자세를 추구했다.

(유교의) 전통적 이론들에은 시간과 시대를 초월하는 영구적인 가치관뿐만 아니라, 중국 각제국과 황제들에게만 유효한, 시대적으로 제한된 가치관들도 포함되있었다.

그후의 발달

이렇게 각 학파들 사이에는 접촉점들도 많이 있었지만, 또한 논쟁점들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점들을 벌써 오래전부터 상호 모순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보충 보완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심지어는 이승에서의 고통과 괴로움 극복을 목적으로 하는, 차후에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중국이 있는 사찰들, 예를 들어 홍콩의 사찰들은 단순히 이생에서의 행복추구를 위해 예언을 구하고, 예식절차를 차린다는 인상을 준다. 즉 현대 거의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불교도 원래의 깊은 정신세계는 이제 그렇게 쉽게 아무데서나 찾을수 없는 것이다.

중국 고대 전통중에 완전히 종교형식으로 굳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점쾌를 보는 역경, 중국의 천문술, 지리와 풍수를 고려한 건축법등 그리고 이미 언급한 중국전통 의술과 치유술등을 들 수 있다. rae: 첫페이지로 가기

 

그리스도의 길

예수 그리스도와 불교에 관한 정보

본 웹 사이트는 다양한 종교들간의 상호 이해증진과, 여러 종교간의 상호 대화에 공헌하기 위한 사이트입니다. 이곳에서는 특히 불교의 각종파와 기독교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상세히 다루려 합니다. 그럼에 있어 기독교의 전적 가능성을 논의의 토대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교파와는 무관한 독립성있는 연구결과를 고려해 봅니다. 물론 부처 (기원전 500)의 삶과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은 아니고, 단지 핵심요점들만 정확하게 다루려 합니다.

부처의 본래 가르침 즉 교리의 핵심은, 인간존재의 핵심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항상 더 자유로와지는 자유 즉 해탈인데, 이는 현재도 힌야나 (Hinayana) 불교에서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고통으로 치닫게 하는 외적, 내적 의미에의 갈망 욕구는 자아에 속하지 않는다 (anatta)“ 라고 인식하며, 적절한 인생항로 또는 명상등을 포함한 단련 연마의 길을 통해 소멸하고, 최종적으로 네바나 (nirvana) 상태로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점을 나중에 발생한 마하야나 (Mahayana) 불교에서는 대부분 잘못 오해해왔습니다. 물론 다른면에서 진보를 부르기도 한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그 전까지의 구 불교종파들에서이승세계로부터의 기피 탈피를 기꺼이, 적어도 한가지 가능성으로 제시한 것과는 달리, 모든 존재 생명체에 대한 감정연대 공감대를 확실히 한 점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하야나불교는 불교에서 반복되어 언급되는 무아 (not-the-self)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 마치 이기적이고 하등한 인간성질을 털쳐버린후에는 나자신 즉 자아가 전혀 남지 않는 것처럼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써 네바나 해탈상태를 무, (nothing) 으로 간주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 스스로는 자신의 체험한, 최상 최고의 경험을 묘사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는 ....직시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는 느끼지도 않고,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닌영역 상태에서의 고통 역시도 확실해졌다. 느낌,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해지려는 욕구에도 치러야하는 댓가가 있는 것이다...“ (Suttam of Anguttara Nikaya 9, Nr. 41...).

이런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도 부처처럼 각양각색의 인간 본성을 정화 순화와, 인간 개개인에게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우선 자기자신부터 비판적으로 돌아볼것을 권고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읍니다..

계속하여 그리스도 역시 자신과 사도제자들이 이승또는 문명세계에 살지만, 거기에 속하지는 않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원초불교에서와는 달리 훨씬 더 확실하게, 이 세상 안에 살고, 그속에서 활동한다는 것도 (요한복음 17) 인정합니다. 그리고 현실세계는 마치 빵을 굽는데 필요한 효모처럼, 예수의 사도제자들을 통해 새로운, 더사랑이 가득찬 세계로 변화될수 있는 것입니다.

어쨋든지 예수와 부처가 남긴 인생사의 제반 문제점에 관한 잠언중에는 너무나 많은 공통점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수십년간 사람들이 혹시 예수가 불교를 가르친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예수가 이런 저런 교리를 설교했다라고 말할수도 있을 것 입니다. 우리 웹사이트의 본문 텍스트에서는 특히 이런 공통점들이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적 현실에 기초한다는 것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논리적으로 당연히 이해할수 있듯이, 인간 정신세계에 접근이 가능하고, 비슷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남에게서 베끼지 않고도, 스스로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각 종교들간의 공통점, 가치관에 공통점이 있다할지라도, 모두가 각기의 고유한, 부분적으로는 서로 다른 상이한 길을 추구하는 것은 부인할수 없습니다.

물론 유대교나 기독교에서는정화시켜야 되는 인간 특성 성질에다, 부과적으로 신에 대한 죄라는 개념을 관련시킵니다. 그래서 우선 먼저 종교에 바탕을 둔 윤리규범을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를 신으로부터 분리 차단시키고 (또한 우리와 동료인간들과의 연대 교대를 저지 방해하는) 모든 성질 성격을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 신자들도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불교에는 신이 없다고 확신하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여러종교들이 함께 윤리 도덕적 입장표명을 할 경우에는, 그들 모두가 인정하는 종말의 진실“, 즉 물질적인 삶의 저편에 존재하는 세계만을 연관시킵니다. 이것은 각 종교에 따라 이 마지막 세계의 의미가 달라진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정확한 의견은 아닙니다.

부처는 결코 신이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살던 당시 상황안에서, 인간이 가야할 길에 대한 자신의 각성과 깨달음을 전하는데 국한시켰을 뿐입니다. 부처는 힌두교 설법가들이 부라마, 즉 힌두교에서의 창조신에 대해 물었을때, 다음과 같이 응답했습니다:

나는 브라마 (Brahma) 를 잘 안다. 그리고 브라마의 세계와, 인간을 그 세계로 인도하는 길, 그리고 브라마 자신이 어떻게 그 세계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도 역시 알고 있다.“ (Digha Nikaya, 13th Speech -영적경험에 연관해서). 힌두교의 브라마를 그대로 직접 성부 (God Father)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할수는 없읍니다: 왜냐하면 브라마의 존재는 여러문화권에서 그러하듯, 오랜 세월을 거치며 신이 가진 여러 특성 즉 신성중 일부만을 인격화, 인간화시킨 것입니다. 어쨋든 브라마는 부정적인 힘, 에너지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 계시록 (the Gospels) 또는 묵시록 (the Revelation) 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버지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며, 만물의 종말을 그분의 온전함으로 이르고 (알파와 오메가 Alpha and Omega), 만물에 그 본성을 부여하며, 창조만물이 직접적으로는 그에게 도달할수 없는 분으로 규정합니다. 기독교의 신비주의자 야콥 뵘 (Jakob Boehme)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러한 신이 이승현실의 만물뿐 아니라, „저승의 그리고 천국세계까지도 창조했음을 역설했습니다. 그러한 심오한 경험을 한, 인사들이 도움과 기여가 있어야만, 각 종교간 심층적 상호이해를 가능케하는 언어를 찾을수 있습니다. ***).

불교의 길, 불도는 네바나로의 몰입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기독교신자 대부분에게 신과의 신비로운 합심일체가 아주 먼 과정인 것처럼, 불교교도 대부분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연히 멀고 소원한 것이다. ****). 하지만 불교에서는 보살 (Bodhisattva)해탈 재생하여 인간세계에 다시 하천하는 가능성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머지 인간을 도우러 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 (God Father) 에게로 승천했으며, 자신의 재림을 예고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현재도

기독교 믿음과 신앙으로 이세계를 신으로 가득 채울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루돌프 슈타이너 (Rudolph Steiner)를 언급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는 부처가 우리에게 사랑의 교리를 전했고, 그리스도는 그 사랑에 힘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는어느면에서는부처를 선구자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진실은 어떠한가라는 것을 깨닫고 싶은 분은 각자 스스로의 길을 나아가며, 내적으로 그리스도 혹은 부처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더 연구하십시오.

*) 구전하는 부처의 가르침은 특히 방대한 부처의 설교집에서 많이 찾을수 있다: “중경 (Agana-Sutra)“; 그리고 장경“. 칼라마 수트라 „Kalama Sutra“ 도 참조: 소문, 구전하는 이야기들, 또 시대의 의견들과, 권위있는 성서 서적, 이성 논리에 바탕에만 둔 결론, 또 꾸며낸 논리와 사회에서 선호하는 의견등, 개인편견의 표현 또 대가의 권위로 너희를 이끌게 하지말라. 그러나 너희 자신들이 스스로 깨달을 때는...“. (깨달음과 진실한 신앙심에서 오는 확신감은 단순한 지적 사고에서의 믿음보다 훨씬 더 공통점이 많다.)

***) 특히 기독교신비주의의 대가인 엑케하르트 (Ekkehart) 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술했다: 네바나라는 개념없이도, 네바나의 경험에 관련된 것들 그리고 그 차이점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신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 신에게로의 회귀 귀환은 한편으로는 원시부터 언제나 존재해왔던 근본 본초로 돌아가는 행운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 동시에 부수적인 것이다. 왜냐면 마치 두개의 똑같은 삼각형처럼, 종전에는 거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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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인간과 신과의 역결합-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길

인생에서의 심원한 문제점들에 대한 자각

기도을 통해 건강을 치유할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도있는 변모를 위해서도 우선 예수가 던진 질문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6). 혹은 "네가 지닌 불온전함중에서,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에서 전진하려면, 꼭 고쳐야만 하는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게 중요하다. 여기서 "실마리, 즉 단서"가 되는 것은 보기에는 아주 보잘것 없는, 우리가 보통 종교적으로 굳이 간주하지도 않는 일상사에서 찾아질수 있다. 어린아이가 청소년으로 또 성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능력들을 획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본래 지녔던 원초의 경험체험능력은 그로 인해 뒤덮여버리고 말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이 기억력과 기도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이렇게 뒤덮여 잊혀지고만, 본래 그대로의 자연적인 체험양상들을 다시 새롭게 획득할수도 있다. 그런다 해도 성인적인 능력은 같이 보존할수 있으며, 경직된 성격 성질도 다시 부드러워지고, 여유있게 된다. 인간 삶의 영적, 정신적 또는 외부적인 파괴 손상에서 오는 인간의 분열현상, 즉 지성과, 독자적이 되버린 욕구본능, 그리고 그 중간에 끼여버린 우리의 "가슴, 즉 우리의 마음과 정서"를 다시 일치시키고 강화시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낙원신화에 나오는 "자각의 나무에 달린 열매, 즉 선악과"는 이러한 인간분열과 관련된 것이다. 또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는 예수의 말도 돌이킴이 가능함을 깊이 깨닫고 자각하는데서 기인한다. 마테복음 18,1-3; 마가복음 10,15; 누가복음 18, 17. 여기서는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모든 인간발전의 토대가 되는 원형적, 본래 성향을 말한다. 이것은 마치 각종 상품물건들에 "사용법"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예정점지되어 있지만, 언젠가 상실해버리고 만 "인간 사용법"의 일부와 같은 것이다. (1 2) 이런 길을 따를 때만이, 오늘날 이성의식의 명백한 한계점을 넘어설수 있다.

(1 2) 그러므로 부정적 (사탄적) 성격을 극복하는 것은 이미 언급된 분열을 치유하는데에도 관계된다. 원형적 이라는 것은 씨.쥐.융 등의 심층심리에서 나온 개념이다.  
원형:융 (C.G. Jung) 의 심층철학 (Tiefenpsychologie) 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로 체험할 수 있는 인간존재의 기본형.  그러나 그런 다른 길들도 기독교에서의 길과 동일한 목표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원형 많은 경우 착잡과 오해의 콘텐츠가 있습니다. 하나님 노인으로 묘사되고, 천당 지옥 집단 무의식 원형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융은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수준의 의식에서 핵심은 적어도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는 이미지 아이디어로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초기에, 심지어는 신화적인 의식 같은 시기 이전(……) 일종의 원시 기억으로 나타납니다. 수준의 의식에는 또한 정도의 차는 있어도 사람들이 경력한 (……) 같은 이러한 표면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적절한 관점을 통해 수준에서 하나님 개념은 모호하며 과장된 묘사라는 (……) 드러냅니다. 신화 전설은 창의적 방식을 통해 상징주의 세계와 상호 작용하려고 시도했는데, 실제로 아이들에게 유용할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인간의 많은 측면에 영향이 있는 상징을 넘어서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전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그릇된 개념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직접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결국 혼자힘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해낼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세 이를 수행하도록 실제으로 방법을 제시하고, 힘과 은혜를 준다. 기독교적 진실을 추구하는 자, 기독교 신비주의자, 기독교 연금술사등이 그러한 온전함을 성취하는 길을 밟은 것이 명백하다. (예로 마테복음 5,48; 요한복음 10,34;등 비교). 기독교인들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수 이방면에 경험을 쌓았다. 그들이 묵묵히 내적인 신아의 길을 추구했나, 아니면 신앙심을 사회활동을 통해실현시켰는가, 혹은 우리가 "전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부르듯 양자를 자기안에서 합치시켰나는 그와는 관계와 없는 별개의 문제다. 수천년간 여러 문화권에서는 인간 내부의 분열과 상심을 극복하는 법, 다시 말하자면 즉 도를 추구해왔다. 도교의 연금술사들과 다양한 종류의 요가등에서 한 노력이 이를 증명한다. (2 3)

(2 3)  마찬가지로 인도어로 요가라는 말은 멍에를 지운다는 말로서 만물의 근원 또는 영원한 것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신인간, 즉 신이며 동시에 인간", 또는 신이 보내신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이 "(로운" 아담)은 인간에 이미 상실해버린 본래 고유의 성격을 다시 획득할수 있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위험할 정도로 늘어난 곡해된 인간삶을 이제 정리 정돈할 때가 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예수는 지상세계를 위한 "행운의 선물"로써 의미있는 삶의 근본출처이신 신의 존재와, 극도로 발전한 인간의식과 정서를 한몸에 통일시켰다. 예수는 타락의 세력도 극복했다. 비록 그가 타 인간과 차이점을 보였다 할지라도, 결국 그도 역시 인간이었고, 그의 삶을 인간으로서 실현시켰던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이 길을 더 쉽게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실행하면 더욱더 그렇다. 역사적 사실로써의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예수의 삶과 부활이 전혀 영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섬에 사는 짐승이 새로운 뭔가를 배우는 때와도 같다. 외떨어진 섬에 사는 짐승들의 경우이런 능력들을 갑자기 훨씬 더 빨리 발달시킬수도 있다. 왜냐하면 독일인 알. 쉴드라케가 깨달았듯이, 짐승이란 모두 보편적인 힘의 장 (mutual field of force) 을 지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선은 교회의 중재 없이도 예수와, 그리고 신과 내적관계를 맺을 수 있다. 물론 각자에게 맞는 기독교인 형제자매들의 공동체가 있는것이 도움이 되기는 한다. 여러가지 서로 상반되는 내용의 신학논리에서, 예수를 한편으로는 인간영혼을 돌보아주는 후원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개혁하는 자로 이분시킨 처사는 궁극적으로 볼때 그리 지혜로운 일은 못 된다. 몇몇 소수인들의 경우, 특히 여러가지 신학의 논리들을 잘 아는 자들의 경우, 이해의 돌약을 돕는다해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간 각자가 예를 들어 "조용한 골방"에 들어가, 혹은 시끌벅적한 시장바닥에서조차도 예수를 인생의 촛점으로 삼을수 있다. 이는 (복음)으로 지금까지 구전해오는 예수의 특성을 기억함으로써 그렇게 할수도 있다. 예수를 그의 사후에도 인지지각할 수 있다는 것, 즉 이승에서 눈에 보이는 몸과 형체가 없이도 느낄수 있다는 것등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현재 역시 영향을 끼치시는 분이다. 또 다수의 인간들이 스스로 목격 경험한 바와 같이, 인간도 의식체로써 (자기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수도 있다. 죽었다 깨어난 사람들도 있지 않는가?

 

나의 근원이며, 나를 도우시며,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3]와 일체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나에게, 나를 신으로 멀어지게 한 것들을 용서하소서;[4]
성령을 통해 나를 창조적이 되게 하소서. [5]
나를 당신의 길로 끌어 올리소서.

(3) 성모 마리아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여기에 마리아를 첨가해도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남성적, 여성적 특성이 승화된다.

[4] 계속해서, 부정적이라고 느껴지는 감정과 심정의 동요를, 구체적으로 그때마다 내적으로 관찰한다.

  • 내적으로 관찰한다. (예를 들어 불안감, 증오심, 무관심과 냉담, 거만함, 필요이상의 과장된 회의감, ... 혹은 머리속에서 생각으로만 떠오르는, 아니면 말로 나오는 문제점들, 그 예로 마테복음5,22 비교).
  • 그런 문제점들에 골몰해 빠져들기보다는, 잠시 침착하게 기다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무슨 문제인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최대한 의식적으로 떠올려본다.
  •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는 육체적으로도 감지할수 있듯, 부담이 되버린 (정신적인) 짐을 기도를 함으로써 신께 맡긴다. (또는 인생전로를 모두 신 또는 그리스도에게 맡길 수도 있다.)
  • 그 후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거나, 혹은 스스로의 의식세계에 ""이 저절로 떠오를 때까지 침착히 기다린다.

[5] 침묵속에 하루 일어난 일들을 '안정' 시켜야지만, 그를 내적으로 소화시키고, 기도 드리기에도 더 쉬어진다. 그렇게 하면 다시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마음이 열린 상태가 된다.

 

이러한 과정서의 도덕윤리의 의미

이 여정의 한 단계가, 바로 만물위에 존재하시는 "신에 대한 사랑"이며,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테복음19,19)는 이웃사랑, 그리고 또한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것은 각자 처한 환경안에서 스스로가 할일을 깨달으려는 노력의 일부가 될수도 있다. 사랑은 예수와 연결된다. 그 이유는 예수의 가장 중요한 성격이 바로 이 사랑이며, 사랑은 지혜와도 연결되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적인 의미에서의 선행을 실천함이 내부적 또는 외부적으로 효과를 보여서, 비로써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예수는 기존도덕의 근본규율들을 유지시켰다. 그 이유는 인간은 (보통) "심는데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전서 6,7)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외부적 규칙을 강조하기보다는, 각 개인들 스스로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맡겼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내부에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경험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양심이라고 느끼는 것과 상응하며, 그로 인해) (요한복음 3) 에서 말하는 것처럼 "새로 거듭 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전체 인간이 예수가 몸소 먼저 모범을 보이신대로 점점 더, 영혼과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인간내부의 원초의 출발점은 우리 마음이나 영혼, 혹은 정신세계에서 경험할수 있는데,경험의 형태는 개인마다 다르다. 각 개인이 어떤 형태로 그리스도 또 그리스도의 힘을 경험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몇번이고 자주, 개개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의식세계로 불러드리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신과) 더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리 대단한 효과가 없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마찬가지로 부단히 반복해야한다.

이렇게 인간내부에서 신의 은총으로 힘이 발달하면 "외부적인" 그리스도, 또는 신에게서 유래한 보편적 치유력으로의 길도 더이상 멀지 않게 된다. 이는 개인마다 체험하는 양상은 다를수 있다 하더라도, 명백해질 것이며, 주위환경에도 상응하는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지금까지는 극소수의 인간만이그러한 심도있는 경험을 했고, 이들은 후에 이러한 "외부 즉 신에게서 유래한" 보편적 치유력은 인간이 수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자신안에 그와 유사한 것이 발달되 있지 못한 사람일 경우에는 고통스럽게 차단의 벽에 부딛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럴 경우에 "심판"이라고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나를 인도하여, 타인이 당신에게 나가는 길에 피해를 주지 말게 하소서 (6)
나를 인도하여, 당신의 뜻대로 타인을 돕게 하소서
내가 가는 여정에 나를 보호하소서 [7]
나를 도와, 당신의 사랑과 더욱 더 조화를 이루게 하소서

(6) 우리 각자에게서 확인한 불완전하고 미숙한 점들, 그리고 또한 긍정적인 성격등을 마치 도표를 작성하듯이 기록해 보고, 그럼으로써 자기 발전을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될수도 있다 :

  • 저마다의 문제점들을 인생에서 발생하는 일과 사건들에 따라 직접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 예를 들어 스스로 좋은 방행으로 개선하려는 결심을 하는 일등은 예수에게서도 역시 중요하다. "...먼저 네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마테복음7,1-5). 이슬람교에서도 자기 자신의 연마 수양은"위대한 지하드 Grosse Gihad", 또는 "성전 즉 위대하고 성스러운 전쟁"으로 통한다. 이는 결국 외부와의 투쟁보다도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활을 하는 것이다.
  • 즉시 화해하라
  • 그리고 가능한 한 직접 서로 용서할 것.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신에게 기도를 드려 그 문제의 해결책을 간구하고 청하며, 내적으로 용서를 베풀라. 이것은 역시 예수에게도 중요하다. 예수도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내적으로 청산정리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2,59; 하지만 아래 5.번를 보시오)
  • 불가피한 경우,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보다는, 타인에게 적당한 선행을 베풀 수도 있다. 신이 간접적으로 다반사를 정화하시기도 한다. 이는 예를 들어서 누가 공동체를 위한 일을 떠맡을 때를 말한다. 기존의 과거지사를 청산하는 것과, 자유의지로써 남을 돕는 역사를 이루는 것은 서로 연결되는 일이다. 그후에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 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37.을 비교하라 ('심는 자와 거두는 자') 그러는데 있어 마테복음7,20-21: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 "내이름으로 주께 기도하라" 삶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용서와 은혜를 빌라. 바로 이것이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 제공할수 없는, 중대한 (주님만이 주실수 있는) 도움인 것이다. 그리하면 숙명이나 운명이 꼭 기계적으로 진행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이런 경우 인간은 마치 신이 인도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고, 모든 것을 소화해 낼수 있고,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마치 신이 최고의 지혜로써 각개인들과 그 주변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길을 계획해 놓은 듯한 느낌도 갖게 된다.

[7] 다른 사람 이름을 여기에 추가해도 된다.

어린 아이가 성숙한 인간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를 참조), 역시 인간의 문화에서도 옛날부터 비슷한 의식발전의 단계를 거쳤다.

어린 아이가 성숙한 인간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를 참조), 역시 인간의 문화에서도 옛날부터 비슷한 의식발전의 단계를 거쳤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새로운 능력들 (자유의지, 감성과 사고력)을 획득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창조만물"에 대한 본래의 친숙함을 감소되고, 그로 인해 문제가 많이 창출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쟝 겝세르 (Jean Gebser) "근원과 현재 Ursprung und Gegenwart" 를 비교하시오. 차례대로 원형적, 마술적, 신비적 이성의식. 또 그를 초월해서, 훨씬 더 확고하며, 모든것을 통합시키는 류의 의식, 즉 우리가 이성적 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을 발전시킬수도 있다.) 거기에는 또한 그러한 발달단계를 맹아부터 알아보게 하고, 적어도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정도의 규모로 발달할 수 있도록 한, 탁월한 본보기를 보여준 선인들의 역활도 컸다. 이는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일어났지만, 이미 언급한바와 마찬가지로 가끔씩은 그로 인한 손실도 컸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오늘날 우리인류 종족이 살아남으려면, 숙명적인 과업앞에 섰다는 것을 안다. 즉 다시금 "비약적 성장" 네지는 벌써 이천년전부터 예정되있는, 진화의 과정단계를 계속 밟아야 하는 것이다 (8). 이는 인간의 기존획득능력들, 예를 들어 이성등을 더 이상 값으로 치르지 않고도 가능하다. 각 개인들 충분수가 늘 이성의식을 전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스스로를 새롭게, 인간본연의 신성한 근본과 결합시키면 (9), 계시록적인 재앙과의 시간싸움도 ""로부터의 도움을 받아 이길수 있다. 그에는 외부적 엑티비스트 (행동주의자)들의 행동, 예를 들어 평화주의운동같은 것도 포함된다. 선의를 품은 자에게는 모두"이 재앙과 시간을 다투는 시합 (Game)" 에서 "마땅히 설" 자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다수가 믿는 종교종파와 관계없이, 이를 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 미래로 먼저 나아가서, 과거를 청산정리하는 것을 돕는다. 아직 "평범함"이 지배하는 때라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에게는 종래가치관의 절대적 변형이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금까지 반복되오는, 낡은 (역사방식을) 반복할 경우, 종말이 어떨지를 뻔히 들여다 볼수 있기 때문이다.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듯, 선행 하나하나가 전체로 흘러든다.

(8) 독일의 철학자 허베트 그륄 (Herbert Gruhl) 이 최후의 저서 "무로 가는 천국행 Himmelfahrt ins Nichts" 에서 보인 비관주의적인 관점에는 동의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발달과 힘의 근본출처인 신의 존재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남은단 한가지 기회는 결국 신일뿐이다.

(9) 종교라는 말은 라틴어로 re-ligio 즉 재결합으로, 우리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도 형체를 지니는 신과의 결합을 의미한다. 멀게는 홀로그람 (Hologramm) 과도 비슷한데, 이는 역시 외부에서도, 즉 인간 내부뿐 아니라 우주에서도 일어난다.

 

인간에게 영감을 주어,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당신의 손에 맡기게 하소서.[10]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도우소서
이세상을 도약시켜, 당신이 약속하신 새시대로 이끄소서.[11]

[10] 이곳에 자세히 사실을 추가할 수도 있다. 또 계속 명상을 해 소화하고 처리해도 된다. 예를 들자면 '폭력과 그에 대응한 반폭력의 증가를 없앰', '문제의 근본을 해결함으로써 폭력이 설 땅을 없앰', '종교계 인사들간의 선의롭고, 평화로운 대화지속' 등등 .

[11] 누가복음 11:2, 21:31; 요한계시록 11:16 신은 인간이 바친 사랑을 다시 나눠줄수 있다

결국 신에게로 "돌아갈, 귀의할" 때가 가까와졌다.

 

요한복음16,12-13: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이를 감당하지 못하리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두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도, 듣는 것을 말하시면,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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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정보, 저작권

1991 - 2014 작성 ; 인터넷 처음 출판일시 2001.01.30; 본페이지는 2003.02.17 / 2003.02.23…일자 작성, 추후정정한, 새 한국어 간략판입니다: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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